하정 유관 선생을 기리는 비우당교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힘을 얻은 이성계는 공양왕에게 왕위를 넘겨받았어요. 하지만 정몽주 등 반대파가 많았어요. 반대파는 대부분 고려에서 벼슬을 했던 사람들로 이성계를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지요. 이후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어요. 수많은 고려의 충신들도 이성계가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깊은 산골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내려 했어요. 이성계가 그들을 계속 부르려 하자 아예 충신 72명은 개성 송악산 두문동 골짜기로 들어가 숨어 버렸어요.
이성계는 다시 한 번 그들을 불렀어요. 그런데도 끝내 나오지 않자 두문동 골짜기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어요. 결국 그들은 불에 타 죽었지요. 사람들은 그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불렀어요. 그 뒤로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한곳에 틀어박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지요.
그런데 유관 선생은 그들과 생각이 많이 달랐어요. 선생은 1346년 고려 말 충목왕 때 태어나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했어요. 그 후로 고려가 망할 때까지 20년 동안 꾸준히 벼슬에 올라 있었지요. 선생은 비록 고려가 망해 임금은 바뀌었지만 백성은 바뀌지 않았는데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1392년에는 조선의 병조이랑에 올라 열심히 일했어요. 유관 선생은 81세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며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이렇게 네 임금을 섬겼어요. 
어느 여름날, 이제 막 벼슬에 오른 젊은 선비가 유관 선생을 찾아왔어요. 유관 선생의 집은 청계천과 가까운 신설동이었어요. 안방과 사랑채가 나란히 붙어 있는 초가였지요. 유관 선생은 몹시 반가워하며 젊은 선비를 맞아들였어요. 
“어서 오게나.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는데 선선한 바람을 쐬며 함께 잡초를 뽑지 않겠나?”
그런데 그 선비는 양반집 아들로 오직 글공부만 하던 사람이었어요. 선비는 머뭇거리며 말했어요.
“한 번도 농사일을 해 보지 않아서…….”
그러자 유관 선생은 꾸짖듯 말했어요.
“농사일이 부끄러운가? 그럼 자넨 먹지도 말게. 무릇 백성이 하는 일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정치를 하나?”
그러나 유관 선생은 곧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채소밭을 가꾸면 즐겁다네. 함께 일하면 정도 들지. 자, 더운 방보다 채소밭이 훨씬 시원하니 이야기도 하고 풀도 뽑으세.”
젊은 선비는 유관 선생을 따라 할 수 없이 밭일을 시작했고, 곧 농사의 즐거움을 배웠지요.

유관 선생의 자그마한 초가엔 울타리도 대문도 없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유관 선생을 찾아왔어요.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비만 오면 개천이 넘치니 힘을 합쳐 나무다리라도 놓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자 자신의 돈을 선뜻 내놓았어요. 유관 선생은 집에서는 언제나 맨발이었어요. 버선이 닳을까 봐 집에 돌아오면 얼른 버선을 벗어 두었지요. 이런 선생의 검소함은 태종에게까지 알려졌어요. 그러자 태종은 ‘어찌 대문도 울타리도 없이 지낸단 말이냐? 내가 대문과 울타리를 선물할 테니 유관의 집을 꾸며 주어라.’하고 명령했어요. 
이후 유관 선생은 세종 때 우의정의 벼슬에 올랐어요. 
그런데 어느 여름, 장맛비가 쏟아졌고 유관 선생의 집이 새기 시작했어요. 아내는 얼른 대야를 방에 가져와 물을 받았어요. 하지만 조금 뒤 다른 곳이 또 똑똑 샜어요. 그러자 이번엔 솥을 가져왔어요. 그래도 다른 곳이 또 샜어요.

“여보, 우산을 가져오시오.”
유관 선생은 우산을 받쳐 들고 글을 읽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청렴결백이 좋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 같습니다.”
아내는 마음이 어지러웠어요. 
“여보, 불평 마시오. 우린 우산이라도 있지 않소? 우산 있는 집이 그리 많지 않다오.”유관 선생은 아내에게 달래듯 말했어요.
유관 선생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아들은 꼬박꼬박 문안인사를 올리고 불편한 곳이 없는지 챙기곤 했지요. 아들 역시 행실이 바르고 학문에도 열심이어서 1426년(세종 8년)에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어요. 그런데 아들은 관찰사직을 맡지 않겠다고 했어요. 유관 선생은 깜짝 놀랐어요. 
“제가 관찰사가 되는 것은 불효이옵니다. 아버님 성함의 관(觀)자가 관찰사의 관(觀)자와 같습니다. 아버님 이름을 밟고 벼슬에 오를 수 없습니다.”
유관 선생은 어처구니없었어요. “그게 무슨 불효냐? 그렇다면 내 이름을 바꾸마. 볼 관(觀)자가 아닌 너그러울 관(寬)으로 바꾸마.”
그 뒤로 유관 선생은 ‘관’의 한자를 바꾸었어요.
이렇듯 아들은 유관 선생을 하늘처럼 여겼어요. 마침내 유관 선생은 ‘청백리’에 올랐어요. 청백리란 깨끗한 관리라는 뜻이지요.
1433년 유관 선생이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세종 대왕은 무척 슬퍼했어요. 세종은 신하들과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즉시 연회를 중단하게 했어요. 그리고 몸소 흰 옷으로 갈아입고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가 흰 옷 입은 관리들과 애도 의식을 행했어요.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죽은 이에 대해 슬픈 뜻을 나타내는 제문을 지었어요.

공께서는 옳지 않은 돈을 받지 않았고, 남을 돕느라 남은 물건이 없으며, 직위가 높으나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덕이 높은데도 교만하거나 인색하지 않아 모든 선비들에게 모범이 되셨다.

유관 선생의 집
유관 선생의 집

하정 유관 선생의 6대 외손이며 실학자였던 이수광은 유관 선생이 살던 곳에 정자를 짓고 ‘비우당’이라는 현판을 걸었어요. 비 새는 방에 우산을 쓰고 글을 읽던 유관 선생의 청렴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가까이 흐르는 청계천 위에 다리도 놓았어요. 바로 비우당교예요. 비우당이라는 말에서는 우산 위로 똑똑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요.

/자료 제공: ‘청계천 다리에 숨어 있는 500년 조선 이야기’(김숙분 글ㆍ정림 그림ㆍ가문비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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