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임금이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손수 밭을 간다고 했지? 이를 ‘친경례’라고 해. 조선이 ‘농사의 나라’이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소중함을 알리는 의식을 행한 것이지. 그런데 왕비는 궁궐 안에 가만히 있지 않고 직접 뽕잎을 따고 누에를 쳐서, 누에고치에서 실을 빼내어 옷감을 만드는 양잠의 본을 보였단다. 이를 ‘친잠례’라고 하지.옛날에는 남성들이 밖에 나가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양식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 안에서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들었단다. 길쌈을 하려면 먼저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야 하지. 그래서 왕비
창덕궁에는 회화나무 여덟 그루가 서 있어. 이 회화나무들은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지. 이 나무들은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궁중 화가인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동궐도」에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동궐도」는 국보 제249호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큰 그림이란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지.궁궐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고대 중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야. 옛날 중국 주나라에서는 궁궐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태사ㆍ태전ㆍ태보 등 삼공이 회화나무를 향해 앉았어. 조선 시대에는
고려 말 대학자였던 길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길재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을 연구했어요. 길재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힘을 키웠고 마침내 조선의 실제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경쟁 세력인 사림파가 되었지요.훈구파는 사림파를 없애려고 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는 등 네 번에 걸친 사화를 일으켰지만 없애지 못했어요. 그들은 쫓겨나도 지방으로 내려가 세력을 다져 나갔기 때문이지요. 사림파는 마침내 선조 때부터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권력을 잡게 되었지요. 하지만 사림파는 얼마 안 가 동
한 남자가 포도청으로 끌려왔어요. 그 사람은 도둑질을 하다 잡혔어요. 포졸들은 그 사람을 억지로 눕혔어요. 죄인의 머리맡에서 한 사람이 여러 개 묶은 바늘로 그의 이마를 찌르기 시작했어요. 죄인은 너무 아파 소리를 질렀어요. 포졸들은 상처 난 자국에 먹물을 넣었어요. 이마에 검은 글씨가 나타났어요. 그 사람의 죄를 이마에 글로 써넣은 것이지요. 살을 바늘로 찌른 후 먹물로 새겨 넣는 것을 문신이라고 하지요. 조선 시대에는 이처럼 죄를 지어 잡히면 이마에 문신을 새겼어요. 이와 같은 형벌을 ‘자자형(刺字刑)’ 이라고 했어요. 사람들은
장통교 근처 장통방에 장경의라는 역관(조선 시대의 중인 계층)이 살고 있었어요. 장경의는 장통교 주변에서도 소문난 부자였는데 그에게는 장옥정이라는 예쁜 딸이 있었어요. “임금님께서 오늘 영희전에 참배하러 수표교를 지나가신대.”장옥정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조선 시대 임금들은 설,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날이면 임금의 영정(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모신 영희전으로 참배(영정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는 일)를 떠났어요. 영희전은 남부 훈도방에 있었는데, 그곳에 가려면 수표교를 건너야 했어요. 장통방 앞 장
정월 대보름날, 하늘에서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어요. 서울 사람들은 이날을 몹시 기다렸어요. 금빛 물이 흠뻑 들어 반짝거리는 청계천에 나가 다리밟기를 하려는 것이지요. 청계천에는 다리 12개가 놓여 있었어요. 다리밟기는 12개의 다리를 일일이 밟아 보는 놀이예요. 정월 대보름날 밤 서울 사람들은 광교와 수표교로 모두 나왔어요. 그리고 보신각 종소리를 기다렸지요. 종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일어나 다리를 밟기 시작했어요. 어떤 사람은 태평소와 장구를 울렸어요. 그러면서 하늘에 걸린 달을 두 손 모아 바라보거나 때로는 청계천 물에 풍
오늘날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을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듯 조선 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누었어요. 북쪽에는 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양반들이 살았고 남쪽에는 몰락한 양반이나 손으로 물건을 만들며 살아가는 가난한 장인들이 살았어요.북촌이나 남촌과는 달리 청계천 장통교 주변 마을인 장통방은 중촌이라고 불렀지요. 그곳에는 역관(통역을 맡아보는 관리), 의관(의술에 종사하는 관원), 천문관(천체나 기상을 연구하는 관리),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살았는데 그들은 조선 시대 중인 계급이었어요. 장통교 주변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