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산업이었어.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고대부터 농사의 신을 받들어 모셨지.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와 후직씨는 인류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농사의 신이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이들을 주신으로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어. 신라의 경우에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지. 매년 입춘이 지난 뒤 첫 번째로 돌아오는 ‘해일(돼지날)’에 선농제, 입하가 지난 뒤 첫 번째로 돌아오는 ‘해일’에 중농제, 입추가 지난 뒤 첫 번째로 돌아오는 ‘해일’에 후농제를 지냈단다. 이러
세조 10년(1464년) 어느 날, 세조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궐을 나섰어. 임금의 전용 가마인 ‘연’을 타고 가는 곳은 속리산 법주사였어. 세조는 오랫동안 피부병을 앓았지. 피부병은 쉽게 낫지 않는 병이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온양 온천을 찾아가는가 하면, 빨리 낫게 해 달라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빌기도 했어. 이번에 법주사로 행차하는 것은 불공을 드리면 피부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해서였지.임금의 가마 행차가 속리산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어. 길가에 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소나무는
세종 29년(1447년) 4월 20일 밤이었어.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 대군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어. 그는 꿈속에서 말을 타고 집현전 학사인 박팽년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지. 그곳에는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는데 꽃이 가득 피어 있었어. 안평 대군은 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갈림길에 다다랐어. 두 사람이 어느 길로 갈까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나타나서 말했어.“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桃園)입니다.”안평 대군과 박팽년은 말을 달려 북쪽 골짜기로 들어섰어. 그
율곡 이이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야. 그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인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여섯 살 때 율곡리로 와서 살았어. 이이의 호인 율곡은 고향 이름을 따서 붙인 거야. 율곡리는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 마을이란다. 율곡리 임진강가 벼랑 위에는 ‘화석정’이란 정자가 서 있어. 이 정자는 원래 세종 25년(1443년)에 이율곡의 5대조 할아버지 이명신이 처음 세웠다고 해. 그 뒤 성종 9년(1478년)에 이명신의 손자이자 이율곡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의석이 다시 세우고, 이의석의 스승인 이숙함이 ‘화석정’이란 이름을
세종 16년(1434년) 12월 24일의 일이야. 명나라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러 중국에 갔던 천추사 박신생이 조선으로 돌아왔어. 박신생은 명나라 황제 선덕제의 편지를 가져왔지. 세종은 절차에 따라 신하들을 데리고 태평관으로 가서 황제의 편지를 공손히 받았단다. 세종은 말없이 편지를 읽었어.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흡족한 듯 웃음을 짓기도 했지. 잠시 뒤 세종이 편지를 접으며 명을 내렸어.“오늘은 저녁때 잔치를 벌여야겠소. 잔칫상을 차릴 때 반드시 두부 요리를 올리라 이르시오.”신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어. 사신이 임무를 잘 마
남산은 서울시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 있는 해발 265미터의 나지막한 산이야.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서울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 왔지. 조선 시대에는 남산에 올라가 한양을 내려다보며 여덟 가지 경치가 볼 만하다고 하여 ‘남산팔영(南山八詠)’이라는 말이 생겼어. 즉, 북악산 자락의 대궐이 안개구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볼 만하다, 멀리 보이는 한강 물이 보기 좋다, 봄이 지나도록 피어 있는 바위 밑의 꽃, 그리고 산마루의 큰 소나무와 삼짇날에 파릇하게 난 풀을 밟으며 걷는 모습이 멋지다, 9월 9일 중양절 언덕 위
창덕궁은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이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고,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궁궐로 꼽히지.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동궐’ 또는 ‘동관 대궐’이라고 불린단다. 경복궁 다음으로 큰 궁궐로, 1997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지.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태종 5년(1405년) 10월 19일이었어. 그로부터 엿새 뒤인 10월 25일에는 ‘창덕궁’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지. ‘창덕(昌德)’은 ‘덕을 빛낸다’는 뜻이란다.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에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 명장이었어. 그런데 이성계가 꽃 가꾸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아니?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권력을 잡았다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성계는 고려의 왕이었어. 이제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이런저런 문제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할 때 환관 김사행이 말했어.“전하, 온갖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궁궐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는 것이 좋습니다. 저와 함께 팔각정으로 행차하시겠습니까? 고려 왕실의 화원이었던 곳입니다.”“지금은 폐허가
최영은 고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야.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무술을 좋아했어. 아버지 최원직은 최영의 나이 열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는데, “장차 큰일을 하려면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 너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 최영은 아버지의 유언을 철저히 지켜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았어. 그가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은 검약하고 소박했으며, 어떤 때는 끼닛거리가 떨어져 굶기까지 했지. 최영은 열여덟 살 때 충청도 도순문사 밑에서 병졸 생활을 시작했어. 그 뒤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며 무장으로 출
우왕 1년(1375년), 북원에서 사신이 왔어. 이인임은 사신을 맞이하려고 했지. 하지만 정도전ㆍ정몽주ㆍ이색 등 신진 사대부들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어. 선왕인 공민왕이 명나라를 섬기기로 했는데 이제 와서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야. 그때 친원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경복흥은 정도전을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로 임명해 버렸어. 그러자 정도전은 이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지.“저를 끝까지 영접사로 임명하시겠다면 북원 사신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를 묶어 명나라로 보내겠습니다.”결국 정도전은 경복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박의중, 뇌물 대신 모시옷을 벗어 주다모시는 한산 모시가 유명하지. ‘올이 가늘고 고운 모시’인 세모시는 한산 모시를 최고로 쳐 줘. 한산 모시는 삼국 시대부터 생산되었는데,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신라 때 한산에 사는 한 노인이 건지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어. 노인은 산속에서 유난히 깨끗하고 늘씬한 풀을 찾아냈지.“처음 보는 풀이네. 말끔하게 잘생겼는걸.”노인은 풀의 껍질을 벗겼어. 그랬더니 보들보들한 껍질이 길고 가늘게 쪼개졌어. 노인은 이 풀의 껍질에서 뽑은 실로 옷감을 짰는데, 이것이 한산 모시의 시초
문익점은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이자 문신이야. 공민왕 12년(1363년), 그는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길가에서 목면 나무를 보았어. 그 순간 문익점은 이런 생각을 하며 목화씨 십여 개를 땄지.‘우리나라에 가서 목화를 재배하자. 그럼 우리 백성들이 목화에서 얻은 솜으로 옷과 이불을 만들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겠지?’문익점은 고려로 돌아올 때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어. 원나라에서 목화씨가 다른 나라로 나가는 걸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들여왔다고 하지? 하지만 그것은 잘못 전해진 이야기
충선왕은 고려 제26대 왕이야. 그는 충렬왕과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 대장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지. 세 살 때 세자로 책봉되었던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다고 해.아버지 충렬왕은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사냥이나 하러 다녔지. 어린 세자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사냥을 떠나려 하자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 그 모습을 보고 유모가 물었지.“세자마마, 왜 우십니까?”세자가 대답했어.“지금 백성들은 살림살이가 어렵고 농사철이 닥쳐왔는데, 어찌하여 아버지는 멀리 사냥이나 다니시는가?”열세 살 때는 세자가 원나라 수도인 연경으로
류청신은 고려 말의 역관이야. 원종 때 전라도 고흥의 고이부곡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몽골어를 배워 역관이 되었어. 류청신은 여러 번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워 충렬왕의 사랑을 받았지. 충렬왕은 그를 처음에 ‘낭장’으로 임명하더니 점점 벼슬을 높여 3품인 대장군으로 삼았어. 부곡 출신은 벼슬이 5품 이상 오를 수 없는데 파격적인 승진이었지. 류청신은 3품에 머물지 않고 상장군과 우승지를 거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어. 또한 출신지인 고이부곡이 ‘고흥현’으로 승격되기도 했단다.류청신은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에게도 잘 보여 ‘청신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만들어져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기슭의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이야. 국보 제32호로, 1995년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인 해인사 장경판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지.팔만대장경은 정식 이름이 ‘해인사 대장경판’으로,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고려 대장경’,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해인사 대장경’이라고 해. 팔만대장경이라는 이름은 불경을 새긴 경판의 수가 8만 1137개나 되고, 번뇌와 법문이 8만 4천 가지라고 해서 붙여진 거란다.‘대장경’이란 일체의 불경을 통
한지는 닥나무를 주원료로 만드는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야. 닥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자라는데, 늦가을에 닥나무 밑동을 잘라 솥에 넣고 쪄서 껍질을 벗겨 말리면 흑피(黑皮)가 되지. 흑피를 흐르는 물이나 통 속의 물에 담가 불려 연하게 만든 뒤, 검은 외피를 긁어 벗기고 석회와 재를 넣어 만든 물에 넣어 서너 시간 끓여. 그리고 이것을 꺼내 맑은 물에 씻어 말리면 백피(白皮)가 되지. 그다음엔 백피를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 올려놓고 빻거나 두들겨서 연하게 만들어. 그러고는 곱게 부서진 백피(닥펄프)에 물을 붓고 풀어, 닥풀 뿌리에서
신라 제2대 남해왕 때 석탈해라는 젊은이가 있었어. 그는 인물도 좋고 꾀가 많았지.어느 날 탈해는 머슴 둘을 데리고 지팡이를 끌고 토함산에 올라갔어. 그는 산꼭대기에 돌집을 짓고는, 7일 동안 거기서 지내며 서라벌을 두루 살펴보았어. 그런데 마침 초승달 같은 언덕에 자리 잡은 집이 눈에 띄었어.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일본에서 건너와 신라 왕 박혁거세의 신하가 된 호공이란 사람의 집이었어. 탈해는 그 집이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그 집을 빼앗을 궁리를 하고 머슴들에게 말했지.“오늘 밤에 몰래 저 집으로 숨어 들어가서 마당에 숯과 숫돌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대학자야.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가 6년 만에 과거를 보아 당당히 급제했지.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황소의 난 때는 반란군 두목인 황소를 꾸짖는 글인 「토황소 격문」을 써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어.신라 헌강왕 11년(885년),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배운 학식으로 정치를 잘 해 보려고 온 힘을 쏟았어. 그러나 당시 신라는 매우 어지러웠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고 백성들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도둑질에 나섰어.최치원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게 되자 스스로 태수가 되어 지방으로
고려를 세운 왕건의 조상 가운데 호경이란 사람이 있었어. 그는 백두산 기슭에 살았는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어. 어느 날 호경은 한반도의 아름다운 땅을 두루 구경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백두산을 떠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 호경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정착하려고 했어. 그런데 경기도 개성 땅에 이르러 부소산(지금의 송악산)에 오르니 경치가 마음에 들었지. 그리고 마을로 내려가 그 주위를 둘러보니 땅이 기름지고 자손대대로 복을 받을 만한 명당 자리였단다. 호경은 여기에 터를 잡아 살기로 하고 부소산 기슭에
초가집은 볏짚ㆍ갈대ㆍ밀짚 등을 재료로 지붕을 이어 지은 집이야. 초가집이라고 하면 대부분 볏짚으로 지붕을 얹은 집을 말하지. 초가집은 우리나라에서 집이 생길 때부터 있었던 민족 고유의 옛집이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서라벌에 부자들이 살아서 초가집이 한 채도 없다고 했어.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삼국 시대에 초가집이 일반 백성들이 널리 이용했던 살림집이었음을 알 수 있단다. 고려 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의 집은 초가집이었어. 큰 기와집에 돈 많은 양반들이 살았다면, 대부분의 가난한 백성들은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