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활자 기술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나라이지요. 이미 고려 고종 때 금속 활자가 만들어져 <상정고금예문>이란 책이 나왔어요.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것으로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만든 것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에요. 세종은 학문을 사랑한 왕이어서 모든 백성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애썼어요.
1443년 12월 마침내 우리글이 만들어졌지요.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글자가 없어 한문을 빌려 와 썼어요. 하지만 한문은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제대로 읽고 쓸 수가 없었어요. 세종이 만든 한글은 쉬워서 누구나 편리하게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지요. 인쇄술의 발달과 한글의 보급으로 일반 서민들도 공부를 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서민들을 지식에 눈뜨게 한 곳이 바로 청계천 주변이었어요. 이곳에는 책과 그림을 파는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어요. 주로 모전교, 광통교, 효경교 등과 육조 거리에 몰려 있었어요. 그곳에선 직접 책을 찍어 내기도 했고 팔기도 했어요. 때로는 책 광고도 했어요.

1576년 7월 수표교 아래 북변 하한수 집에서 책을 찍었으니 살 사람은 오시오.

사람들은 광고문을 보고 책을 사러 가기도 했지요. 그 당시의 책들은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같은 학습서와 <숙향전>, <심청전> 등 한글 소설이었어요. 조선 시대 사람들은 소설을 아주 좋아했어요. 소설이 인기가 좋자 언제부턴가 소설을 읽어 주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런 사람을 ‘전기수’라 불렀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이란 뜻이지요. 전기수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은 청계천의 광통교와 배오개다리 아래,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로 여섯 군데 정도였지요. 동대문 밖에 주로 살던 전기수는 6일에 한 번씩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사람들은 그때를 기다렸다가 몰려들었지요.
“오늘 배오개다리 아래 갈 거요?”
넓적한 돌에 옷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철썩철썩 두드리면서 어머니들은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어머니들이 배오개다리 아래로 달려갔을 때는 벌써 사람들이 가득 몰려와 있었어요. 사람들은 전기수를 에워싸고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기수는 드디어 큰 소리로 ‘오늘은 장화홍련전이오~.’ 하고 끝을 길게 끌며 들려줄 이야기의 제목을 말했어요. 사람들은 침을 삼키며 눈을 더욱 크게 떴어요. 
“평안도 철산군에 배무용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장 씨였지요. 어느 날 장 씨가 꿈에서 꽃 두 송이를 받았어요. 그리고 장 씨 부인은 딸 둘을 낳았어요. 아주 예쁜 딸들이었지요. 배무용은 딸들에게 장화와 홍련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그런데 장 씨는 딸들을 낳느라 너무 힘들어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만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전기수의 목소리는 마구 떨렸지요. 그리고 배무용이 되어 구슬피 우는 흉내를 냈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어요. 전기수는 계속 이야기했어요.
“장화는 귀신이 되어 밤에 홍련에게 나타나 ‘홍련아~ 홍련아~.’ 하고 불렀어요.”
전기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장화를 흉내 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어요. 그런데 전기수가 이야기를 중간에서 뚝 그치는 것이었어요.
“그 다음! 그 다음!”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어요. 그래도 전기수는 입을 딱 다물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전기수 앞에 돈을 던졌어요. 돈이 수북해지자 전기수는 신이 나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어요.

 

“결국 홍련이도 언니의 죽음을 알고 연못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철산 사또 방에 처녀 귀신 두 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으리……, 나으리…….’이 소리에 사또가 잠에서 깨어났다가 처녀 귀신을 보고 너무 놀라 쓰러져 버렸어요. 사또는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어요. 그 다음 사또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러자 모두들 철산 사또로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안타깝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숨을 죽이고 전기수를 바라보았어요. 전기수가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고 눈을 크게 뜨며 실감나게 말했어요.
“그런데 정동우란 자가 처녀 귀신을 잡겠다며 자원해서 사또로 왔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어요.
“정동우가 밤에 잠을 청하는데 드디어 처녀 귀신이 나타났어요. 
‘나으리……, 나으리…….’
이때 정동우가 벌떡 일어나 귀신들을 쏘아보았지요. 
‘너희들은 누구냐?’
‘장화와 홍련입니다.’
‘너희들은 어이하여 이다지도 악한 일을 하느냐?’
‘저희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 사또들께서는 저희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시니 답답하옵니다.’”
전기수는 사또가 말할 때는 당당하고 굵직한 목소리로 처녀 귀신이 말할 때는 구슬픈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어요.
“‘계모 허 씨가 저희들을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사옵니다.’
‘너희들은 어디 있느냐?’
‘연못 아래 있사옵니다.’
‘내가 이 일을 밝혀낼 테니 이제 돌아가거라.’
그러자 장화와 홍련은 사또 앞에 절을 하고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편안한 표정이 되었어요.
“다음 날 정동우는 연못 아래서 장화와 홍련의 시체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허 씨와 그 아들을 붙잡아 처형시키고 장화와 홍련을 장사 지내 주었어요. 배무용은 윤 씨를 다시 세 번째 아내로 맞았어요. 윤 씨가 꿈에 선녀들에게 꽃 두 송이를 받고 또 딸 둘을 낳았어요. 배무용은 이들에게 장화, 홍련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지요. 장화, 홍련은 후에 이연호의 쌍둥이 아들 윤필, 윤석과 혼인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가 끝났어요. 그래도 사람들은 한참 동안 배오개다리 아래 더 앉아 있었어요. 장화홍련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처럼 소설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더욱 발전했어요. 마침내 청계천 주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이 세워졌어요. 그곳에서 재미있는 책들이 수없이 인쇄되었지요.
1897년 고유상이라는 사람은 15만 원을 들여 광통교 옆에 회동서관을 설립했어요. 회동서관은 출판과 판매를 같이 하는 큰 서점이었어요. 그곳에 가면 신소설, 사전, 실용서 등 갖가지 책이 있었고 학용품도 살 수 있었지요. 또 청계천이 시작되는 물줄기와 남산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곡교 옆에 조선광문회가 세워졌어요.

배오개다리 현재 모습.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라는 고개가 있었기 때문에 배오개길이라고 한 데서 다리 이름도 배오개다리라고 지어졌다.
배오개다리 현재 모습.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라는 고개가 있었기 때문에 배오개길이라고 한 데서 다리 이름도 배오개다리라고 지어졌다.

이곳도 큰 서점이었지요. 청계천은 이처럼 조선 시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깨우쳐 주는 장소였지요.

/자료 제공: ‘청계천 다리에 숨어 있는 500년 조선 이야기’(김숙분 글ㆍ정림 그림ㆍ가문비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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