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은 천민 신분으로 태어났어요. 장영실의 어머니는 관청에서 일하는 기생이었어요. 기생은 조선 시대 천민이었지요.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장영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천민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장영실은 열 살 때부터 관청의 노비가 되었지요. 하지만 똑똑하고 재주가 뛰어나 이치를 쉽게 깨달았고 특히 손재주가 남달라 무슨 물건이든 잘 만들었어요.
장영실은 관청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처지여서 과거를 볼 길조차도 없었지만 틈틈이 책을 읽었어요.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만들어 내는 것을 즐거워했지요.
‘나라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는 아이인데 천민으로 태어나다니…….’장영실을 노비로 데리고 있던 동래현 현령은 이런 장영실을 무척 안타까워했어요.
그런데 마침 태종이 ‘양반이든 천민이든 재주가 있는 사람을 알리도록 하라.’ 라는 분부를 내렸어요. 동래현 현령은 장영실을 한양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지요. 이 소문은 고을에 퍼져 모두 장영실을 부러워했어요. 장영실은 동래에서 한양까지 천 리 길을 단숨에 달려갔어요. 동래현 현령이 써 준 편지를 이조라는 관청에 올리고 일자리를 얻게 되었지요.
장영실은 한양에서도 차차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마침내 1410년 2월 대궐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태종은 기생의 아들인데도 행동이 바르고 재주가 뛰어난 장영실을 귀여워했어요. 
세종은 동궁(세자)으로 있을 때부터 장영실을 보았고 그 솜씨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장영실을 가까이 두고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격려했어요. 
어느 날 세종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왕이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하늘의 이치를 잘 알고 천문 기상에 밝아야 하는 것이 당연해.’
뿐만 아니라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이는 이치를 잘 알아야 자연의 변화를 알기 때문에 농사도 잘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천문과 지리에 밝은 신하 네 명을 한양에서 가까운 지방의 군수나 현감으로 임명했어요. 세종은 천문과 지리 연구를 하면서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있는 시계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원나라는 이미 유럽까지 지배했고 과학도 발달하여 훌륭한 발명품을 많이 만들어 냈지요. 특히 원나라 초기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간의는 하늘의 별과 달을 관측하는 기구인데 아무도 흉내를 내지 못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원나라는 1368년 명나라에 망했어요. 
세종은 명나라에 학자를 보내 기술을 배우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영실을 명나라로 유학 보냈어요. 그곳에서 장영실은 간의와 자격루를 보았는데, 그 비밀을 번개처럼 알아챘어요. 돌아온 장영실은 1434년 별의 위치와 움직임을 기록하는 혼천의와 시각을 자동으로 알려 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완성했어요. 세종은 자격루를 우리나라의 표준 시계로 삼고 경회루에서 축하 잔치를 베풀었어요. 장영실의 자격루는 원나라 것보다 뛰어나 세종은 몹시 흡족했답니다.
동시에 또 하나의 일이 진행되고 있었어요. 앙부일구라는 해시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앙부란 솥 모양의 그릇이 하늘을 본다는 뜻이고, 일구는 해시계란 뜻이지요. 오목한 솥 모양의 앙부일구 안에 설치된 영침(그림자를 만드는 침)의 방향은 지구의 자전축과 평행한 정북극 방향에 맞추어야 하지요. 세종 때 천문학자들은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정북극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어요. 장영실이 만든 관측 기기는 한성의 위치가 북위 38도라는 것도 알아냈어요. 또 북극성까지의 거리도 밝혀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앙부일구 내부의 눈금선이 정확히 그려질 수 있었어요. 그리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시각을 읽을 수 있도록 자시(밤 11시~오전 1시)에는 쥐를, 축시(오전 1시~오전 3시)에는 소를, 인시(오전 3시~오전 5시)에는 호랑이를, 정오를 나타내는 오시에는 말을 그려 넣었어요. 직경 35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앙부일구 역시 원나라의 것을 발전시킨 것이었어요. 세종은 앙부일구를 2개 만들게 했어요. 

앙부일구 : 1434년(세종 16년)에 처음 만들어진 해시계이다. 솥 모양 그릇 안쪽에 24절기를 나타내는 눈금을 새기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이 있어 이 바늘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눈금에 따라 시각을 알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없어지고, 2~3세기 후에 만들어진 앙부일구 2개가 남아 있다.
앙부일구 : 1434년(세종 16년)에 처음 만들어진 해시계이다. 솥 모양 그릇 안쪽에 24절기를 나타내는 눈금을 새기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이 있어 이 바늘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눈금에 따라 시각을 알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없어지고, 2~3세기 후에 만들어진 앙부일구 2개가 남아 있다.

①간의(簡儀):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는 기계로, 오늘날의 각도기와 비슷한 구조를 지녔다.
②자격루(自擊漏): 물이 떨어지는 것을 이용하여 스스로 시간을 쳐서 알리도록 만든 시계의 한 가지. 
③혼천의(渾天儀):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는 기계.

이것 역시 혼천의와 자격루가 완성된 1434년 10월에 만들어졌어요. 백성을 위해 과학 발전에 힘쓴 세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세종은 앙부일구 2개를 어디에 놓을지 고민했어요. 가능하면 많은 백성이 지나다니는 곳에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한 개를 종묘 남쪽 거리에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두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개는 청계천 혜정교에 두었어요. 혜정교가 있던 곳은 종로 네거리 한복판이었어요. 그곳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지요
사람들은 앙부일구를 보려고 혜정교에 나왔지요. 혜정교에 나온 백성들은 앙부일구를 보며 외쳤어요.

“정말 신기하구먼!”
사람들은 그림자가 시각을 알리는 게 신기하기만 했어요.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모두 함께 보는 시계)였지요. 글자를 모르는 사람도 동물 그림으로 시각을 알 수 있었어요. 백성들이 좋아하니 세종도 무척 행복했어요. 큰일을 해낸 장영실도 마찬가지였답니다.

/자료 제공: ‘청계천 다리에 숨어 있는 500년 조선 이야기’(김숙분 글ㆍ정림 그림ㆍ가문비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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