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해마다 가뭄과 홍수를 걱정하는 백성들이 안타까웠어요. 가뭄과 홍수는 종종 백성들의 목숨까지 빼앗기도 했지요. 세종은 깊은 생각에 빠졌어요.
‘비의 양을 잴 수 있거나 강의 높이를 잴 수 있다면 미리 어려움을 막을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한 세종은 장영실을 불렀어요.
“계절에 따라, 장소에 따라 내리는 비를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시오.”
장영실은 갑자기 동래에서 노비로 있을 때가 생각났어요. 그때도 각 고을에 비가 얼마만큼 내렸는지 보고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날도 비가 많이 내렸지요. 비가 그치자 사또가 장영실을 불렀어요.

“자, 담 밑에 흙을 파서 땅속 어디까지 물이 스며들었는지 재어 오너라.”
사또는 이렇게 말하며 놋쇠로 만든 자를 주었어요. 하지만 장영실은 장독대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기 때문에 물의 깊이를 금방 잴 수 있었어요. 장영실은 물의 깊이를 재어 달려왔어요.
“빗물의 깊이는 한 자 두 치이옵니다.”
사또는 깜짝 놀랐어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아느냐? 벌써 땅을 파 보았단 말이냐?”
장영실은 또박또박 말했어요.
“나리, 모래는 빗물이 빨리 스며들고 찰흙은 늦게 스며들어 정확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낮은 땅에는 빗물이 모여 깊이 스며들고 높은 땅은 물이 빠르게 흘러가 버려 그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독대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습니다.”
사또는 장영실의 지혜에 놀라며 흐뭇해했어요. 하지만 이제 장영실은 빗물의 깊이를 가장 정확하게 잴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 문제였어요.
세종의 명령에 세자(뒤에 문종)도 함께 이 일을 연구했어요. 1441년 8월 18일 장영실은 마침내 빗물을 재는 그릇을 만들었어요. 높이 41.2센티미터, 지름이 16.5센티미터인 둥근 기둥 그릇이었어요. 그릇 안쪽에는 눈금이 새겨져 있었지요.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된 것이었어요.
그 이듬해인 1442년 5월 8일 장영실은 빗물 재는 그릇의 표준을 정했어요. 높이 30.9센티미터, 지름 14.4센티미터였어요.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빗물 재는 그릇에는 측우기라는 이름이 지
어졌어요. 세종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어요. 세종은 구리로 만든 측우기를 조선 각 고을마다 설치하게 하고 비의 양뿐 아니라 비가 내리기 시작한 날짜와 시각, 멎은 날짜와 시각을 기록하고 한양 정부에 보고하라고 명령했어요. 이렇게 하니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지요. 장영실은 또 흐르고 있는 물의 양을 재는 방법을 생각했어요. 장영실이 생각해 낸 것은 냇물에 눈금이 새겨진 쇠기둥이나 돌기둥을 세워 물의 깊이를 보는 것이었어요. 이 기둥을 양수표라고 했어요. 물의 양을 재는 표라는 뜻이지요. 양수표를 수표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양수표 역시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었어요.
“이제 수표가 홍수 때 물이 넘칠 것을 알려 주겠구나.”
세종은 장영실을 바라보며 물었어요. 세종은 어서 수표를 청계천에 세우고 싶었어요. 마전교 근처에는 소나 말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어요. 그런 가게를 마전이라고 했어요. 마전교는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하지만 마전교는 다른 다리와 다른 점이 있었어요. 처음에 마전교는 나무다리였어요. 그런데 1421년 여름,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되었을 때 큰비가 연이어 퍼부었어요. 10년 전 태종이 청계천을 파내어 물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동안 청계천에는 아무 일이 없었어요.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로 청계천이 갑자기 넘치기 시작했어요. 75채나 되는 집이 떠내려갔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청계천에서는 다시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세종은 청계천으로 흘러오는 작은 물줄기까지 깊게 파서 물이 잘 흐르도록 만들라고 했어요. 10년 동안의 계획을 세우고 농사일이 한가한 철을 이용해서 청계천 가장자리를 돌로 쌓고 다리도 고쳤어요.
1422년에 나무다리였던 마전교도 화강암 다리로 바꾸었어요. 그리고 다리 기둥을 과학적으로 특별하게 만들었어요. 다리 기둥은 대부분 일자였지만 마전교는 2층으로 만들었어요. 아래 돌기둥 위에 얹은 기둥은 마름모 모양이었어요. 모서리가 물의 흐름과 마주하고 있어서 흐르는 물의 힘을 덜 받도록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비가 와도 마전교 다리는 버틸 수 있었어요. 
1441년(세종 23년) 세종의 명령으로 마전교 곁에 수표와 측우기가 세워졌어요. 3척이라고 표시된 눈금까지 물이 차면 물이 적은 것이고, 6척 눈금에 오면 보통이고, 9척 눈금까지 물이 차면 위험하다는 것을 나타냈어요.
“이제 이 다리에 수표가 세워졌으니 수표교라 부르도록 하라.”
백성들은 수표교를 자랑스러워했어요. 1959년 청계천 복개 공사를 할 때 수표교만은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어요. 수표도 홍릉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지요. 청계천 다리 중 고스란히 보존된 것은 수표교뿐이에요. 오늘날도 강의 다리에는 수표가 설치되어 있지요.

수표교와수표 : 수표교는 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1420년(세종 2년) 만들어졌는데 당시 이곳에 마전이 있어서 마전교라고 불리다가 1441년(세종23년)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석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불렀다.
수표교와수표 : 수표교는 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1420년(세종 2년) 만들어졌는데 당시 이곳에 마전이 있어서 마전교라고 불리다가 1441년(세종23년)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석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불렀다.


/자료 제공: ‘청계천 다리에 숨어 있는 500년 조선 이야기’(김숙분 글ㆍ정림 그림ㆍ가문비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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