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산업이었어.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고대부터 농사의 신을 받들어 모셨지.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와 후직씨는 인류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농사의 신이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이들을 주신으로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어. 
신라의 경우에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지. 매년 입춘이 지난 뒤 첫 번째로 돌아오는 ‘해일(돼지날)’에 선농제, 입하가 지난 뒤 첫 번째로 돌아오는 ‘해일’에 중농제, 입추가 지난 뒤 첫 번째로 돌아오는 ‘해일’에 후농제를 지냈단다. 이러한 풍속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졌어. 그런데 점차 간소화하여 고려 시대에는 선농제와 후농제를 지냈고, 조선 시대에는 선농제만 지내게 되었지.

조선 시대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

 

선농단은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야. 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번지 1호에 사방 4미터의 돌단만 남아 있어. 1972년 8월 30일에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 사적 제436호로 승격되었지.
조선 시대에 선농제는 매년 경칩이 지난 뒤 첫 번째로 돌아오는 ‘해일(돼지날)’ ‘축시(새벽 1~3시)’에 지냈어. 이날 제례는 임금과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하고 성대하게 치러졌지. 제례를 마치면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쇠뼈와 쇠머리로 탕을 끓였어. 그리고 그 탕에 밥을 말아 임금과 문무백관은 물론 백성이 나누어 먹었지. 이를 ‘선농탕’이라고 하는데,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야. 선농탕은 구개음 변화를 일으켜 ‘설롱탕(설렁탕)’이 되었지.
그런데 이 이름은 다른 유래도 있어. 쇠뼈로 끓인 국물이 눈처럼 희고 뽀얗다고 ‘설농탕(雪濃湯)’, 탕을 끓일 때 설설 끓는다고 ‘설농탕’이라고 불렀다는 거야.
선농단 제사의 제수를 장만하는 것은 관동 노비들이었어. 조선 시대에 성균관 근처를 ‘관동’이라고 했는데, 노비 출신들이 모여 살았지. 이들은 소를 잡아 제단에 올리고, 사람들이 먹을 국을 끓였단다. 그런데 처음에는 김치가 준비되지 않아서 파를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췄는데, 나중에 모두가 이렇게 설농탕을 먹게 되었다는구나.
선농제 때 탕을 끓인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제사 고기를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없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살코기는 안주로 쓰고, 큰 솥에 물을 부어 쇠뼈와 쇠머리로 탕을 끓였지.
선농단 남쪽에는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짓는 밭인 ‘적전’이 마련되어 있었어. 임금은 선농제를 올린 뒤에는 적전으로 가서 손수 밭을 갈았지. 이를 ‘친경(親耕)’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에게 농사일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이런 행사를 가졌단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6년(1475년) 1월 25일 자에는 “임금께서 선농단에서 제례를 올린 뒤, 해 뜰 무렵에 친히 밭을 가셨다. 월산 대군을 비롯하여 재상 신숙주 등의 신하들과 일반 서민들이 함께 약 2천 평의 밭을 일구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친경 행사에는 농부들 가운데 나이가 많고 복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 참여시켰다는구나.
선농제와 친경은 조선 왕조에서 5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어. 그러다가 순종 2년(1908년)에 선농단의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겨 모시면서 중단되었지. 그 뒤 선농단 터는 일제가 우리 민족 문화를 없애려고 청량대 공원으로 만들었어. 8ㆍ15 광복 후에는 그 자리에 경성 여자 사범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가 들어섰지. 지금은 그곳에 선농단을 복원하고 선농단 역사 문화관을 세웠으며, 선농단 일대를 선농단 역사 공원으로 지정하였단다.


▶선농단 옆에 5백여 년 된 향나무가 서 있었다고요?
선농단 옆에는 5백여 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단다. 높이 10미터, 둘레가 2미터에 이르는데, 현재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지. 이 나무는 국내에 있는 향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조선 시대에 선농단을 세울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서울 선농당 향나무.
서울 선농당 향나무.

선농단이 있는 마을을 옛날에 ‘계터 마을’이라고 불렀어. ‘계터’는 ‘제사를 지내던 터’인 ‘제기(祭基)’의 발음이 변해서 된 것인데, 이곳은 지금 ‘제기동’으로 불리고 있지. 선농단 남쪽에 있는 적전은 ‘전농’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이 동네는 ‘전농동’이란 이름이 붙었어. 그리고 ‘창동’은 전농에서 수확한 곡식을 넣어 두는 창고가 있어 얻은 이름이란다.

/자료 제공=‘식물로 보는 한국사 이야기 ② 조선 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신현배 글ㆍ김규준 그림ㆍ뭉치 펴냄)

저작권자 © 소년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