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은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이자 문신이야. 공민왕 12년(1363년), 그는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길가에서 목면 나무를 보았어. 그 순간 문익점은 이런 생각을 하며 목화씨 십여 개를 땄지.
‘우리나라에 가서 목화를 재배하자. 그럼 우리 백성들이 목화에서 얻은 솜으로 옷과 이불을 만들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겠지?’
문익점은 고려로 돌아올 때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어. 원나라에서 목화씨가 다른 나라로 나가는 걸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들여왔다고 하지? 하지만 그것은 잘못 전해진 이야기야. 
당시에 원나라에서는 화약과 지도 등만 다른 나라로 나가는 것을 막았을 뿐이야. 목화씨는 금지 품목이 아니었지. 따라서 문익점은 목화씨를 붓두껍에 몰래 감출 필요가 없었어. 『조선왕조실록』에도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무렵에, 길가에서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십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쓰여 있어. 

 

고려로 돌아온 문익점은 고향인 강성현(경남 산청군 단성면)으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씨를 심어 길렀어.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알만 자라나, 3년 만에 꽤 많은 씨앗을 얻을 만큼 목화 재배에 성공했지.
정천익은 중국에서 온 승려 홍원의 도움을 받아 목화에서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들었고, 목화 재배법과 베 짜는 기술은 10년도 못 되어 나라 전체에 퍼져 널리 목화가 보급되었지. 이로써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익점과 정천익 덕분에 추운 겨울에 따뜻한 무명옷을 입게 되었고 푹신한 솜이불을 덮고 자게 되었단다.
목화는 많은 종이 있지만 그 가운데 재배되는 것은 육지면ㆍ해도면ㆍ인도면ㆍ아시아면 등 4종이야. 육지면은 전 세계에서 목화 생산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이 섬유는 섬세하고 길어 최고의 방적 원료로 꼽히지. 해도면은 섬유가 길어 고급 실을 뽑는 데 좋고, 인도면은 가장 긴 역사를 지녔지만 인도 말고는 재배하는 곳이 없어. 아시아면은 오랜 옛날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재배되었던 재래종으로 섬유가 짧고 거칠지.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가 바로 이 아시아종이야. 우리나라에서는 아시아종을 오랫동안 재배하다가 1905년 일본 영사 다카마쓰가 들여온 육지면으로 점차 품종을 바꾸어 나갔어. 요즘은 화학 섬유가 발달하고 다른 나라에서 값싼 원면이 많이 수입되어 목화를 그리 많이 재배하지 않는단다.

▶무명은 목화에서 얻은 옷감이지요?
무명은 무명실을 써서 재래식 베틀로 짠 옷감이야. ‘면포’ 또는 ‘무명베’라고도 해. 가을이면 목화꽃이 피었다가 지고, 봉오리가 벌어져 목화송이에 하얀 솜이 나오지. 이 목화송이를 따 가을볕에 말린 뒤, 목화에서 씨앗을 빼는 데 쓰이는 도구인 씨아에 넣고 손잡이를 돌려. 그러면 목화송이 속에 있는 씨앗이 톱니 사이로 걸러지고 납작해진 솜이 나온단다. 그다음엔 씨앗을 뺀 목화송이를 활로 비벼 솜이 구름처럼 부풀게 하지. 그러고는 솜을 수수깡에 돌돌 말아 기다랗게 고치를 만들어. 이 고치를 다발로 묶어 물레에 걸고 돌리면 무명실이 나온단다.
옷감을 만들려면 무명실을 씨실(가로)과 날실(세로)로 겹쳐 가며 엮는 베틀을 이용해야 해. 베틀에 무명실을 걸고 베 짜기를 하면 무명천이 만들어지지. 무명천으로는 사계절에 필요한 옷을 모두 만들어 입을 수 있었어. 목화가 들어오기 전에는 비싼 비단옷을 지어 입을 수 없어, 서민들은 삼베옷으로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어. 하지만 무명이 생산되어 솜을 두둑이 넣은 무명옷
을 지어 입게 되자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무명은 모시와 삼베를 제치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옷감이 되었어. 옷감이 비단 못지않게 따뜻하면서도 질기고 부드러워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무명옷을 입었어.

/자료 제공=‘식물로 보는 한국사 이야기 ①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신현배 글ㆍ김규준 그림ㆍ뭉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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