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대학자였던 길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길재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을 연구했어요. 길재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힘을 키웠고 마침내 조선의 실제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경쟁 세력인 사림파가 되었지요.
훈구파는 사림파를 없애려고 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는 등 네 번에 걸친 사화를 일으켰지만 없애지 못했어요. 그들은 쫓겨나도 지방으로 내려가 세력을 다져 나갔기 때문이지요. 
사림파는 마침내 선조 때부터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권력을 잡게 되었지요. 하지만 사림파는 얼마 안 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졌어요.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당파를 만들게 되었지요. 이것을 붕당이라고 해요. 대체로 서경덕의 제자들은 동인,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 조식의 제자들은 북인이 되었어요. 뒤에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였어요. 영조는 이러한 붕당을 없애려고 탕평책을 썼어요. 탕평책이란 붕당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으려는 정책으로 당파 싸움을 없애려는 노력이었지요. 하지만 각 당파들은 계속 권력을 독점하려고 여러 음모를 꾸몄어요.
1749년 55세가 된 영조는 건강이 좋지 않아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신 정치를 맡겼어요. 남인과 소론 세력은 사도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 했어요. 그러자 노론 세력이 사도세자를 몰아내기 위해 영조에게 이간질을 하기 시작했어요. 세자가 잘못을 저지른 것들을 적어 영조에게 바쳤어요. 그중에는 영조를 내몰고 왕이 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음모까지 섞여 있었어요. 분노를 이겨 내지 못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들였어요. 
“뒤주를 가져와 세자를 가두어라!”
뒤주는 쌀을 담아 보관하는 나무로 만든 크고 네모난 궤짝이지요. 사도세자의 아들 산이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영조는 뒤돌아보지도 않았어요. 

‘우르르 쾅!’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졌어요. 뒤주를 끌어안고 산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울부짖었어요. 결국 8일 만에 사도세자는 목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그때 나이는 겨우 28세였어요. 영조는 당파 싸움을 없애려 했지만 오히려 거기에 휘말려 아들을 죽인 셈이지요. 사도세자는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 묻혔어요.
이후 산은 영조를 이어 왕이 되었어요. 바로 정조 임금이지요.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에 연루된 사람들을 처형했어요. 정조는 정약용을 시켜 수원에 화성을 짓게 하고 사도세자의 무덤도 그곳으로 옮겼어요. 그곳이 현륭원이지요. 정조는 사도세자를 참배하러 현륭원에 자주 찾아갔어요. 그때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함께 갔어요. 
현륭원에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했지요. 그때 배다리로 한강을 건넜어요. 배다리란 수백 척의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정조는 지금의 청계천4가 북쪽 동네에 주교사를 설치했어요.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맡아 하는 기구지요. 주교사에서는 배다리 놓는 방법을 연구해서 그것을 기록한 <주교사절목>을 만들었지요. <주교사절목>에 보면 가장 큰 배를 한강의 중앙에 띄우고 차차 작은 배를 연결해서 가운데는 높고 양쪽 끝이 낮아지는 무지개 모양의 배다리를 만드는 법이 나와 있어요. 배다리를 설치하는 장소로는 물살이 약한 노량진이 가장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뱃사람들은 배다리를 싫어했어요. 대부분의 배들이 배다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지요. 
정조가 만든 주교사는 1882년까지 계속 있었지만 항상 배다리를 만들지는 않았어요. 최초로 한강에 인도교가 준공된 것은 1917년이 되어서였지요. 정조는 창덕궁을 떠나 수표교를 건너 용산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노량진에 걸쳐 있는 배다리를 건넜어요. 노량진에 도착하면 몹시 피곤했지요. 그래서 노량진 본동 중턱에 정자를 마련해서 쉬었어요. 이 정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용봉정이지요. 내려다보면 언덕의 푸른 나무 아래로 반짝이는 한강이 흘러가고 멀리 남산과 북악 사이에 펼쳐진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지요. 용봉정에서 휴식을 취한 왕은 다시 수원을 향해 떠났어요. 정조는 사당동 사거리를 지나 남태령을 넘었어요. 남태령을 넘으면 과천 행궁이 있는 온온사가 있었는데 정조는 이곳에서 또 잠시 쉬었어요. 정조는 다시 과천 찬우물 거리를 지나갔어요. 그때 이곳에서 물맛을 보고는 ‘차고 맛있다’라고 하여 이 우물에 ‘냉정’이라는 이름도 붙여 주었지요. 정조는 다시 인덕원을 거쳐 지지대 고개를 넘어 수원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찬우물 거리 오른쪽에 김약로의 무덤이 있었어요. 그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지요.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어머니가 무덤을 보고 마음이 상할까 봐 새로운 길을 알아보았어요. 신하들은 과천을 지나지 않고 시흥으로 가서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어요. 그 길이 오늘날 국도 제1호선의 일부인 시흥대로예요.
이러한 정조의 행차 모습을 그린 것이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예요. 정조가 어머니와 함께 화성에 다녀와서 만든 것으로 8일간의 행차 보고서이지요. 1700여 명의 인물과 800여 필의 말이 행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김홍도의 지휘 아래 당시 쟁쟁한 화가였던 김득신과 이인문 등이 참여해서 함께 그렸어요.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 도자 벽화 : 조선 22대 정조 임금이 1795년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수원 화성과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다녀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이 담겼다. 왕실 기록화이자 한 폭의 풍속화인 반차도는 당시 행차 격식과 복식, 의상, 악대 구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 도자 벽화 : 조선 22대 정조 임금이 1795년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수원 화성과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다녀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이 담겼다. 왕실 기록화이자 한 폭의 풍속화인 반차도는 당시 행차 격식과 복식, 의상, 악대 구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조는 1795년 2월 9일부터 8일간 회갑 잔치를 벌였고 문과와 무과 등 여러 행사를 펼쳤지요.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는 63쪽이나 되며 예술성이 뛰어난 문화유산이지요. 이 병풍은 처음부터 여러 벌 그려서 호암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창경궁에 보관되어 있어요.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는 누구나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청계천 광교와 장통교 사이의 벽에 그려 놓았답니다. 

/자료 제공: ‘청계천 다리에 숨어 있는 500년 조선 이야기’(김숙분 글ㆍ정림 그림ㆍ가문비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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