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임금이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손수 밭을 간다고 했지? 이를 ‘친경례’라고 해. 조선이 ‘농사의 나라’이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소중함을 알리는 의식을 행한 것이지. 그런데 왕비는 궁궐 안에 가만히 있지 않고 직접 뽕잎을 따고 누에를 쳐서, 누에고치에서 실을 빼내어 옷감을 만드는 양잠의 본을 보였단다. 이를 ‘친잠례’라고 하지.

옛날에는 남성들이 밖에 나가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양식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 안에서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들었단다. 길쌈을 하려면 먼저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야 하지. 그래서 왕비는 해마다 3월에 ‘누에의 신’인 선잠에게 먼저 제사를 지내고 친잠례를 행했단다.
선잠은 중국 고대의 3황 5제 중 첫째 왕인 황제의 부인인 서릉이야. 서릉은 처음으로 누에 치는 법과 실 잣는 법을 가르쳤대. 그런 그녀를 ‘누에의 신’으로 받들어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선잠단에서 제사를 올렸지.
선잠단은 선잠을 모신 곳인데, 조선 초기에는 혜화문 밖에 있다가 뒷날 선농단이 있는 곳으로 옮겼어.
영조 때 펴낸 『친잠의궤』에는 친잠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그 기록에 의하면, 영조의 왕비 정성 왕후 서씨는 세자빈, 내외명부 부인들과 함께 친잠례를 행했어. 왕비는 먼저 선잠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동행한 부인들과 뽕잎을 따서 광주리에 담았어. 그들이 따는 뽕잎 가지의 수는 저마다 달랐는데, 왕비는 다섯 개, 내외명부 1품이 일곱 개, 내외명부 2품과 3품이 아홉 개였단다. 그 뒤 왕비가 궁궐로 돌아가고, 세자빈과 내외명부 부인들이 뽕잎을 누에 있는 곳에 가져가면 누에 치는 여성인 잠모가 뽕잎을 썰어 누에에게 나눠 주었지. 그리하여 세자빈과 내외명부 부인들도 궁궐에 돌아오면 왕비가 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단다.
우리나라에서 양잠이 시작된 것은 고조선 시대부터야. 중국의 양잠이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보여.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왕비와 함께 돌아다니며 누에고치를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양잠으로 생산한 신라의 비단이 중국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해. 양잠은 고려 시대에도 성행했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 국가적인 산업으로 널리 시행되었어. ‘누에 치는 곳’을 ‘잠실’이라 하는데, 세종 때는 궁궐과 서울의 밤섬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고 사대문 밖에 잠실을 설치했지. 세조는 양잠에 관심이 많아 지방의 수령들에게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적극 권장했어. 그 결과 성종 때는 양잠이 널리 보급되었단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에 뽕나무밭을 일구었다면서요?
두사충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왔어. 그는 풍수 전문가로서 이순신과 자주 만나 전략, 전술을 논하였다고 하지. 두사충은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어 장차 청나라가 명나라를 집어삼킬 거라고 보았지. 그래서 그는 오랑캐 백성으로 살 수 없다며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 사람이 되었단다.
선조는 그를 한양에 살게 해 주었지만 두사충은 대구로 내려와 살았어. 풍수의 대가답게 경상 감영 자리에 터를 잡고, 아들에게는 “하루에 천 냥이 나오는 길지”라고 말했지. 뒷날 그곳이 대구의 중심가가 되었다는구나. 2년 뒤 경상 감영이 대구로 옮겨 오자, 두사충은 그 땅을 경상 감영 터로 내주고 지금의 계산동으로 이주했어. 그는 백성들의 의복 문제를 해결한다며 4천여 평 땅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지. 지금은 도시화로 뽕나무가 거의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는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며 그 옛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단다.

/자료 제공=‘식물로 보는 한국사 이야기 ② 조선 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신현배 글ㆍ김규준 그림ㆍ뭉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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