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차이나’ 열풍 _ 델프트 도기 튤립 꽃병 ②

청화백자를 닮은 델프트 도기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에 델프트라는 도시가 있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무역에 참여한 여섯 개 도시 가운데 하나지. 그런데 이곳에서는 16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도공들이 도기를 만들고 있었어. 그들도 네덜란드 상선이 가져온 청화백자를 당연히 접했겠지. 
청화백자를 접한 델프트 도공들은 청화백자를 모방하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완전히 똑같게 만드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지. 그들의 기술은 여전히 ‘도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그래도 델프트 도공들은 청화백자의 모양이나 새겨진 그림과 무늬를 최대한 모방해서 도기를 만들었어. 델프트 도기의 가격이 청화백자의 십 분의 일이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중산층도 구입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사람들은 이 도기를 ‘델프트 블루’라고 부르며 열광했어. 
인구 2만 4000명의 작은 도시 델프트에 도기 공장이 32개나 있었다고 하는구나. 언제부턴가 유럽에서는 흰색 바탕에 푸른색 그림을 그린 도기는 꼭 델프트에서 생산한 것이 아니더라도 ‘델프트 블루’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델프트 도기는 초기에는 중국적인 느낌이 무척 강했어. 모양도 그림도 중국인이 좋아하는 것이었지. 중국 청화백자를 그대로 모방했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기술과 경험이 쌓이면서 델프트 도공들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어.
델프트 도공들이 중국식 도자기에 자기 나라 사람들의 취향을 접목해 만든 것이 바로 앞에서 보여 준 화반이야. 그럼, 이 화반에는 어떤 꽃을 꽂았을까? 이 도자기를 만든 곳이 델프트이고, 델프트는 네덜란드의 도시라는 점을 떠올려 봐.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꽃은 튤립! 이 화반은 바로 튤립을 꽂는 용도로 만든 거야. 

 

그런데 네덜란드의 튤립에는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가 있어. 튤립은 중앙아시아가 원산지라고 해. 오스만제국 때 서아시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고, 상인들을 통해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갔어. 네덜란드에는 1593년 레이던 대학교의 식물학자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는구나. 이후 튤립은 사람들에게 보면서 즐기는 꽃으로 사랑받기 시작했어. 17세기 초부터 네덜란드는 아시아를 누비며 중국과 일본의 자기뿐 아니라 각종 상품을 유럽으로 가져와 엄청난 이윤을 남겼고, 암스테르담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 Wikimedia Commons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 Wikimedia Commons

당시 사람들은 부와 번영을 만끽하면서 튤립을 네덜란드의 부와 번영의 상징으로 내세웠어. 그러자 튤립이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꽃값이 치솟았어. 심지어 사재기까지 유행했지. 가격이 어느 정도였냐면, 어떤 튤립은 그 알뿌리 값이 숙련 장인의 십 년 소득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해! 자기 땅을 담보 삼아 튤립에 투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갑자기 너도나도 튤립을 팔겠다고 했지. 집과 땅을 팔고 빚을 내서 튤립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됐어. 튤립 화반에는 그런 네덜란드인의 역사가 담겨 있어. 튤립이 부와 번영의 상징으로 네덜란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튤립 화반을 원했고, 그 수요에 맞게 델프트 도공들이 생산했던 거야.

커피와 차의 유행으로 위기를 맞다
델프트 블루는 유럽인들의 청화백자에 대한 욕구를 대신 충족시켜 주면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오래지 않아 어려움을 겪게 돼. 그건 유럽에서 뜨거운 음료가 유행한 것과 관계가 있어. 16세기에 들어온 중국의 차 문화가 18세기쯤 유럽에 정착하고, 17세기에는 커피와 초콜릿 음료가 전해졌는데, 이것은 도자기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어. 세 음료 모두 뜨겁게 해서 마셨는데, 도기는 뜨거운 음료를 오래 두기에 적합하지 않은 반면, 자기는 보온성과 내열성이 모두 좋아 뜨거운 음료를 담기에 알맞았던 거야.
차, 커피, 초콜릿은 상류층뿐 아니라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졌고, 자기 수요도 확 늘어났어.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중국과 일본은 질이 떨어지는 대신 값이 싼 자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했어. 저렴한 자기가 들어오니,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델프트 도기는 경쟁이 안 되었을 거야.
게다가 더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어. 1709년 독일 마이센을 시작으로 유럽도 드디어 자기 자체 생산에 성공한 거야. 그러나 델프트 도기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실용성 면에서는 자기에 밀렸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지. 청화백자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히려 개성이 넘치고 색다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거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소 투박해 보이는 도기에 더 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오늘날은 자기가 주도하는 시대이지만, 델프트 도기는 장식용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자료 제공=‘세계사를 담은 도자기 이야기’(강창훈 지음ㆍ웃는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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