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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개 청계천 다리에 숨어 있는 500년 조선 이야기 - 무학 대사를 기념하는 무학교

2024-02-01     정준양

조선 시대에는 청계천을 개천이라고 불렀어요. 비만 오면 물이 넘쳐 피해가 생기자 태종 임금 때부터 둑을 쌓거나 폭을 넓혀 수리했어요.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지금은 무학교와 광통교 등 22개 아름다운 다리를 자유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청계천은 바로 조선 500년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다리마다 숨어 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조선의 정치와 문화, 사회를 배우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읽고 청계천을 걷는다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뿌리도 알 수 있겠지요. 


무학 대사를 기념하는 무학교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어요. 무학의 부모는 고려 말 바닷가를 노략질하던 일본의 도둑 떼에게 끌려가다 간신히 도망쳐서 안면도에 숨어들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갈대를 꺾어 삿갓을 만들어 팔며 가난하게 살았지요. 무학은 18세에 집을 떠나 혜명 스님 아래에서 공부하다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어요. 그곳에서 역시 유학 중이던 나옹 혜근 스님(1320~1376)을 만나 제자가 되었어요. 혜근 스님은 공민왕(1330~1374)의 스승이었어요. 스님의 다른 제자들은 그러나 무학이 천민이라며 배척했어요. 그래서 무학은 홀로 토굴 속에서 살며 수도 생활에 전념했어요. 고려 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무학 대사를 존경했지요.
어느 날 이성계는 토굴로 무학 대사를 찾아갔어요. 통나무 세 개를 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뜻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듣고 무학 대사는 말했어요.
“통나무 세 개는 임금 왕(王)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장차 왕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성계는 무학 대사를 스승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늘 가까이 머물며 도움을 청하곤 했어요.
1377년 이성계는 고려에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며 고려를 지키는 데 공을 세웠어요. 그런데 명나라가 또 고려를 괴롭혔어요. 그러자 최영은 명에게 계속 당할 수 없으니 요동으로 쳐들어가자고 의견을 내세웠어요.
마침내 1388년 5월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 5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으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장마가 져서 강물이 불어나 압록강을 건널 수가 없었어요. 이성계와 조민수는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로 우선 피했어요. 이런 상황인데도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독촉했어요. 군대는 우왕과 최영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요. 결국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를 이끌고 개경(고려의 수도로 개성의 옛 이름)으로 돌아와 최영과 싸움을 벌였어요. 고려 말은 사회가 몹시 혼란했어요. 백성들의 마음이 이성계에게 기울자 힘을 얻은 이성계는 결국 고려를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어요. 최영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무학 대사의 예언이 맞은 것이지요. 이성계는 왕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어요. 
어느 날 이성계는 또 꿈을 꾸었어요. 왕관을 쓰고 왕의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쏘아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너가 우리 자손을 모두 죽였으니 어찌 원한이 없으리오!”
이성계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어요. 그리고 무학 대사에게 꿈 이야기를 했어요.
“꿈에 나타난 왕은 분명 왕건일 것입니다.”
이성계가 이렇게 말하자 무학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폐하, 새 도읍지를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성계는 무학 대사를 보며 말했어요.
“어디가 좋겠소? 새 도읍지를 좀 알아봐 주시오.”

이성계의 부탁으로 무학 대사는 새 도읍지를 찾아 나섰어요. 걸어 걸어 남쪽으로 내려와 청계천에 도착했어요. 대사는 청계천을 따라 계속 걷다 왕심평에 도착했어요.
‘음, 이곳이 참 좋겠는걸. 앞에 물이 흐르고 궁궐을 짓기 좋은 넓은 벌판이니…….’
무학 대사가 그런 생각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저편에서 백발노인이 소를 타고 왔어요. 노인은 무학 대사 옆을 지나치며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구나. 어찌 좋은 자리를 두고 엉뚱한 곳만 찾을꼬!”
그 말을 듣고 무학 대사는 노인에게 달려갔어요.
“노인장께서는 어디 사시는 뉘시온데 저를 아십니까?”
노인은 그 소리는 들은 척도 않고 말했어요.
“여기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를 가면 아주 좋은 땅이 나온다네!”
무학 대사는 다급하게 다시 한 번 물었어요.
“북동쪽으로 십 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왕(往) 십 리 하시오!”
노인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왕십리란 십 리를 가라는 뜻이지요.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으며 길을 재촉했어요. 무학 대사는 달려가 노인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어요.
“어디에 사시는 뉘시옵니까?”
“나는 무학봉에 산다오.”
노인은 그 말을 마치고 사라졌어요. 무학 대사는 얼른 무학봉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어요. 무학 대사는 서둘러 노인이 알려 준 대로 왕심평에서 북동쪽으로 십 리를 걸어 올라갔어요. 뒤에는 북악산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는 곳이었어요. 무학 대사는 북악산에 올라가 다시 한 번 멀리서 궁궐 터를 살펴보았어요. 멀리 한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그 안쪽에 남산이 아담하게 솟아 있었어요. 무학 대사는 마음이 흐뭇했어요. 이렇게 해서 한양이 조선의 새 도읍지가 되었어요. 이성계는 노인이 일러 준 곳에 경복궁을 짓기 시작했어요. ‘경복’이란 이름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시경>에서 따온 것으로 큰 복을 빈다는 뜻이지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듬해 1395년 9월 드디어 경복궁이 다 지어졌어요. 그리고 조선의 도읍지가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어요. 이후에도 이성계에게 무학 대사는 평생 동안 소중한 사람이었어요. 이성계에게 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곁에서 조선을 위해 온 힘을 쏟았지요. 무학 대사가 도읍지를 찾아 내려왔던 왕심평은 그 뒤로 왕십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어요. 그리고 왕십리 앞에 흐르는 청계천에는 다리가 하나 세워졌지요. 그 다리는 무학 대사의 이름을 기념하여 무학교라고 부른답니다.

 

/자료 제공==‘청계천 다리에 숨어 있는 500년 조선 이야기’(김숙분 글ㆍ정림 그림ㆍ가문비어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