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 베팅

「식물로 보는 한국사 이야기」“내 무덤에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이다.” 말했던 최영 장군

2024-06-25     정준양

최영은 고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야.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무술을 좋아했어. 아버지 최원직은 최영의 나이 열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는데, “장차 큰일을 하려면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 너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 최영은 아버지의 유언을 철저히 지켜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았어. 그가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은 검약하고 소박했으며, 어떤 때는 끼닛거리가 떨어져 굶기까지 했지. 
최영은 열여덟 살 때 충청도 도순문사 밑에서 병졸 생활을 시작했어. 그 뒤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며 무장으로 출세했지. 싸울 때마다 이겨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어. 
최영이 종일품 판삼사사 벼슬에 올랐을 때의 일이야. 우왕 2년(1376년), 왜구가 지금의 부여인 홍산에 쳐들어오자 그는 환갑의 나이에 전쟁터로 나갔어. 그때 맨 앞에 나서서 적진으로 뛰어들었는데 화살 하나가 날아와 그의 윗입술에 꽂혔어. 하지만 최영은 태연하게 화살을 뽑은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싸움을 지휘하여 왜구를 전멸시켰단다. 
우왕 14년(1388년), 고려의 재상인 문하시중이 된 최영은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를 모았어. 모두 3만 8천여 명의 군사가 모아졌지.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에 임명하여 총지휘를 맡겼어. 좌군 도통사에는 조민수, 우군 도통사에는 이성계를 임명했어. 최영은 대군을 이끌고 직접 요동 정벌에 나설 생각이었어. 하지만 요동 정벌군을 격려하기 위해 우왕과 함께 서경(평양)에 왔다가 왕의 간청으로 함께 서경에 남게 되었단다. 우왕은 혼자 서경에 남아 있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지.
그해 5월 7일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요동 정벌군은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이르렀어. 위화도는 흙과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섬으로, 중국과 마주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지. 그때 장마가 시작되어 이성계는 진군을 멈추고 조민수와 상의를 했지.
“조 장군, 요동 정벌은 불가능한 일이오. 지금이 어느 땐데 군사를 동원하는 겁니까?”
“이 장군,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오? 더구나 나라에서 하는 일 아닙니까?”
“제 얘기 좀 들어 보십시오, 조 장군. 요동 정벌이 왜 불가능한지 아십니까? 첫째, 요동까지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장마철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넘치고 무기가 녹습니다. 좀 있으면 전염병까지 퍼질지 모릅니다. 둘째, 바쁜 농사철에 논밭을 버려두고 왔으니 병사들의 사기가 살아 있겠습니까? 셋째, 우리가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그 틈을 노려 왜구가 쳐들어올 것입니다. 약기가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니까요. 넷째, 작은 나라가 어떻게 큰 나라를 이깁니까? 달걀로 바위치기이지요.”
“그럼 이 장군은 요동 정벌을 포기하고 되돌아가자 그 말씀입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하께 글을 올려 군사를 돌릴 것을 청하는 겁니다.”
“좋습니다.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에게 글을 올렸어.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무조건 진격하라는 답장을 보냈지. 이성계는 그 명령을 따를 수 없었어. 그래서 조민수를 설득하여 군사를 되돌리고 말았지. 역사적인 이 사건을 ‘위화도 회군’이라고 해. 
요동 정벌군은 반란군이 되었어. 이성계는 개경까지 쳐내려와 도성을 함락시켜 버렸어. 최영이 이들과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어. 최영은 이성계 군대에게 붙잡혀 고봉(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을 갔어. 고봉에서 합포(지금의 경상남도 창원)로, 합포에서 충주로 옮겨진 최영은 우왕 14년(1388년) 12월 개경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지. 사형 직전, 최영이 말했어.
“너희들은 나를 죄인으로 몰아 죽이지만,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다. 내 평생에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졌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최영의 무덤에는 정말 풀 한 포기 나지 않았어. 후세 사람들은 이 무덤을 가리켜 ‘붉은 무덤’이라고 불렀단다.

최영을 사랑했던 백성들은 그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면서요?
최영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전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걸어 당대 최고의 맞수가 되었단다. 두 사람은 출신 성분부터 달랐어. 최영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철원 최씨 가문 출신이라면, 이성계는 동북면 지방으로 이주해 온 변변치 않은 가문 출신이었어. 따라서 최영은 당시 고려의 기득권층이었던 권문세족 편에 섰고, 이성계는 자신과 출신 성분이 비슷한 신진 사대부들과 손을 잡았지. 최영이 왕의 의견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 비해, 이성계는 신진 사대부들과 함께 이 나라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최영이 고려의 충신으로 생애를 끝낸 데 비해,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될 수 있었어. 최영은 이성계와 맞선 인물이었기에 조선 시대에는 사면복권이 될 수 없었어. 하지만 최영을 사랑한 백성들은 그를 신격화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지. 그래서 오늘날에도 최영 장군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이 있단다.

/자료 제공=‘식물로 보는 한국사 이야기 ①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신현배 글ㆍ김규준 그림ㆍ뭉치 펴냄)